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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람

이재화 변호사- 민중의소리 인터뷰 만인보

by 바다기린 2015. 1. 3.

 ‘인생역전’ 이재화 “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이후 20대로 돌아갔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진보당 대리인 이재화 변호사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시간 2014-12-08 14:41:49 

최종수정 2014-12-11 11:46:46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823371.html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심판 사건에서 진보당 측 대리인이었던 이재화(51) 변호사가 최후변론을 하는 동안 방청석 곳곳에서는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때 이재화 변호사는 방청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평소처럼 당당한 모습이었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 그리고 힘 있게 준비해온 최후변론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1년의 긴 마라톤 끝에 이제 헌법재판관들의 최종 결정만 남았다. 이재화 변호사는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가 된 뒤로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스스로도 놀랄 일이다. 그는 그동안 진보당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자칭 강남좌파 변호사였기 때문이다. 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을 계기로 초심을 되찾아 20대로 돌아간 것 같다는 이재화 변호사를 2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재화 변호사김철수 기자

그는 화염병 던지던 운동권학생이었다

이재화 변호사 사무실에는 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관련 자료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정부가 처음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증거 자료만도 트럭 두 대에 담을 분량이었다. 이재화 변호사는 그동안 꼼꼼히 여러 번 이 자료들을 검토했다.

그러다가 최후변론에서 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후변론에서 이재화 변호사는 자신을 운동권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87년 헌법 체제를 만들었던 이른바 민주화 세대. 고려대 법대 82학번인 그는 1학년 때부터 화염병을 던지며 전두환 정권에 항거했다. 그 과정에 붙잡혀 실형 1년을 선고 받아 옥살이까지 했다. 당시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던 같은 학교 후배인 여자친구가 지금의 아내다.

이재화 변호사는 민주화 운동을 할 때만 해도 다른 이들처럼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며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후 이재화 변호사는 한 번 더 공안당국에 붙잡혀갔는데, 월간지 에서 기자로 잠시 활동하던 때다. 90년대 초쯤 이른바 사노맹 사건이 터졌을 때였는데, 그가 했던 박노해 시인의 부인 김진주 씨 인터뷰를 안기부(지금의 국정원)가 문제 삼으며 그를 끌고 간 것이었다. 법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이재화 변호사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법전을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시민들을 위해 제대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는 뒤늦게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혁명으로 세상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의식 있는 사람이 각 영역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호사를 하면서 민주사회를 위해 필요한 역할들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시 신혼이던 이재화 변호사는 없는 살림에 90년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 96년도에 합격했다. 아내가 학습지 교사 등을 하며 어렵게 뒷바라지를 했고, 그러는 동안 아이도 둘을 낳았다.

인생역전’? 돈 많이 벌고 놀기 좋아하던 변호사

이재화 변호사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당시 그가 냈던 행정법연습책이 대학 전공서적이 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지금도 이 책은 대학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재화 변호사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연 1억원 넘게 벌고 고급승용차도 몰고 다니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99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할 때 그는 이미 스타 변호사가 돼있었다. 개업 2년차부터는 운전기사와 고용변호사를 둘 정도였고, “전관예우 누리는 사람만큼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만에 당시 9억짜리 강남 도곡동의 아파트를 얻었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던 때와는 완전히 180도 다른 삶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변호사를 하면서 초심을 잃었던 것 같다. 요즘 말로 강남좌파가 된 거다. 머리는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몸은 부르주아 변호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IMF 직후에 변호사를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리 잡아야 되니까 돈 버는 맛에 빠져 버렸던 것 같다. 사람 변하기 참 쉬운 것 같다.”

이재화 변호사는 그동안 시국사건, 국가보안법 사건의 변론을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고도 털어놨다. ‘공동변론이란 것도 그동안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관련 사건의 변론을 주로 맡아왔다.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 때 입당해서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의 형사사건을 변론해왔다. 대부분 무죄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인기는 더해졌다. 민주당 법률부단장 등 당직도 맡았고,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 후보(30)로 출마도 했다. 그는 돈도 적당히 벌고, 적당한 사회생활도 하고, 기회가 되면 국회의원도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진짜 속물인간이었다고 자신을 돌아봤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정봉주 그리고 통합진보당



이재화 변호사김철수 기자

그런 이재화 변호사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정봉주 전 의원이 ‘BBK 사건으로 구속되면서다. 이 사건은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정봉주 의원이 구속되면서 그동안 사회를 위해 뭔가 노력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을 살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새정치위원회 반부패특별위원회 활동을 마친 이후에는 정말 더 이상 정치 쪽으로 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당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 대선이 끝난 뒤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민변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민변에서는 회비를 낸 것 말고는 실질적으로 한 게 얼마 안 됐다. 초심으로 돌아와서 20대 후반, 30대 초반 변호사 때처럼 활동했다. 집회도 열심히 다니고, 민변 논평과 고소고발장도 직접 썼다. 초심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굉장히 즐겁더라. 지금은 거의 없는데 처음에 민변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정치적 캐리어를 쌓기 위해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보내더라.”

그러던 중 지난 해 9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이다. 이재화 변화사는 당시 친분이 있었던 내란음모 사건 변호인단 단장 김칠준 변호사로부터 변호인단 합류를 권유 받았지만 거부했다고 밝혔다. 통합진보당과는 그동안 담을 쌓고 지내오던 터였다.

이재화 변호사는 멋쩍게 웃으며 당시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밝혔다. 그의 고민은 당시 상황에 비춰봤을 때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3차례에 걸쳐 같이 변론하자고 했는데 제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국면에서 사건을 만든 흔적이 역력하고, 좀 과격한 용어를 쓴 것만으로 내란음모로 기소한 것도 말도 안 되고, 이 사건에서 변호사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좀 내키지 않더라. 이석기 의원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솔직히 정치적 행보를 할 때 꼬리표가 달리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화 변호사는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때문이었다. 같은 해 125일 이재화 변호사는 수원구치소에서 피고인들을 접견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라디오로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소식을 들었다.

그 뉴스를 들으면서 머리가 쭈삣 서더라. 누가 막 머리를 딱 한 대 치는 것 같았다. , 이것은 파시즘의 시작, 유신시대의 부활이라는 생각이 딱 들었다.”

이재화 변호사는 이번에 먼저 진보당의 대리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처음엔 기자 출신이었던 만큼 공보 업무 정도 도울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진보당 쪽에서도 처음엔 그에 대해 별 기대를 안 했던 것 같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대리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 정부의 청구서를 봤는데 정말 어이가 없더라. 색안경을 쓰고 해방 이후 모든 진보운동을 마치 북과 연계해 활동한 것처럼 매도하고, 자주민주통일, 민주주의가 모두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이라는 식으로 만들어놨더라. 진보당이 해산되면 우리의 모든 것들이 매도되겠다, 진보운동을 하거나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이 역사의 죄인처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전력투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재화 변호사는 정부가 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뒤로 1년 동안 다른 사건은 하나도 수임하지 않고 오로지 진보당 사건만 파고들었다. 평소 골프도 치며 놀기 좋아하던그는 그것도 다 끊고 주말에도 쉼 없이 달렸다. 그런 만큼 깨달은 것도 많았다. 이번 사건이야 말로 이재화 변호사에겐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이 재판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스스로 반성할 기회도 됐고, 변호사로서 의지만 가지면 시대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 내 머릿속은 20대 때와 똑같다. 정봉주 의원 사건을 보면서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이번 사건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20대로 돌아간 거다.”

20대로 돌아간 이재화 변호사, 이제 다시 시작이다

헌법재판소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말로 싸우는 것이지만 날카로운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이재화 변호사는 여러 차례 정부와, 그리고 재판관들과 싸웠다. 이재화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이미 싸움닭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와본 헌법재판소였지만 그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당에서 맡았던 형사 사건들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정치사건을 많이 다뤄봤던 그였기에 특수부, 중수부의 생리나 기법은 그의 손바닥 안에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재화 변호사는 정부 측 논리의 한계를 봤고, “진보당은 해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재화 변호사는 최후변론을 끝으로 진보당 대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다. 그는 그동안 내용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책으로 낼 생각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재화 변호사는 여전히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의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허투로 한 말이 아닌 듯 보였다. 이재화 변호사는 인터뷰 다음 날인 3일 발족한 민변의 변호권 및 시민의 자유 수호를 위한 특별위원회에 결합했고, 대법원에 상고법원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그렇다면 초심으로 돌아간 이재화 변호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이재화 변호사는 진보적 가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당의 자주민주통일이라는 것은 진보당만의 노선 아니고 해방 이후에 쭉 이어진 진보운동이 쌓아온 가치다. 나도 그 부분에 동의한다.”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시간 2014-12-08 14:41:49 

최종수정 2014-12-11 11:46:46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8233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