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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외

by 바다기린 2010. 9. 1.

이 책은 페이지마다 흥미로운 사례와 인용구,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위험사회》의 연장선상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 저술로 읽을 수도 있고,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도, 신혼 부부가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좀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참고서로도,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부모노릇의 깊이와 어려움을 가르쳐주는 교과서로도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과 남녀 평등에 대한 대학생 수준의 기본 저서로서도, 여성운동가들을 위한 진지한 토론 자료로도 이 책은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배은경, 12~13)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권기돈, 배은경 옮김, 새물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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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과 결정은 그 사회의 노동시장과 복지에 의해 앞서 조건 지워진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일대기는 노동시장에서 어떠한 교환을 이뤄내느냐 앞으로의 노동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자본을 소유하게 되느냐에 따라 구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시장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기 위한 학력과 자기개발은 불가피하다. 이런 점에서 노동시장의 참여조건인 학력과 “자기실현”으로 불리는 자기개발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의무로 강제된 것이다.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내몬다. 현대의 개인은 언제나, 자기를 개발하라는 명령에 각종의 시험과 경쟁을 치른다.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의 교환이 성사되거나 계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노력과 경쟁은 불가피하다. 노동시장의 가입조건과 교환유지는 경쟁자가 늘수록 더 까다로워지고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진다. 미취업의 불안, 해고의 불안, 직장상사로부터의 스트레스, 동료와의 경쟁에 따른 두려움과 좌절은 일상의 근본기분이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취업의 문은 점점 더 좁혀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생산력화, 세계화로 인한 자본과 설비의 이동성의 증가 등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문은 높아지고 점점 축소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세 가지 소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인간들 간의 소외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외가 우리 시대에 첨가되었다.

필자들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불안과 허무, 소외를 벗어나거나 외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을 택했다고 말한다. “POP에서 포르노까지” 주위의 모든 대중매체는 언제나 사랑을 테마로 한다. 아침 라디오부터 저녁 드라마까지, 사랑에 관한 사연과 드라마는 24시 영업 중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현대의 근본주의가 되어버린 것이다....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다.”(41)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뜻한다”(308). 지독한 외로움과 소외를 견뎌내는데 사랑은 유일한 안락과 도피처를 제공한다. 사랑은 남녀노소 결혼여부에 상관없이, 세대와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 공통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사랑은 점점 황량해져 가는데, 사람들은 사랑이 깨졌을 때조차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다란 희망을 사랑에 걸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온갖 개인적 배신이 난무하는 불쾌한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버팀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23)


이 책은 “사랑이 사생활의 신(神)”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을 분석한다.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왜 현대인들은 사랑에 목숨을 걸게 되었는지, 그러한 조건아래에서 남성과 여성의 삶과 사랑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중세의 악마적 이미지의 ‘아이’가 현대에는 가장 고귀한 ‘천사’로 변신하게 되었는지, 사랑의 의미, 사랑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사랑을 얻지 못함으로써 치러야 할 삶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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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인남성의 결혼 나이가 보통 32~5세라고 한다. 여성의 결혼 시기는 이보다 조금 더 빠르다. 대부분의 남성의 결혼이 늦어지는 배경에는 결혼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것에 있다. 경제적 기반, 직장과 주택은 남성이 혼인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입조건이다. 달리 말하면 그가 노동시장에서의 자신의 노동력이 교환되는 거래 혹은 계약을 가지고 있느냐와 상대에게 집이라고 상징되는 중상층의 자본을 제공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우리사회의 결혼 조건이다.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안정된 수입과 집이 필수적이다. 국가가 집을 주지도 자녀의 교육을 시켜주지도, 병을 고쳐주지도 않기에 주택과 교육비, 보험비 등 미래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이 늦춰지고, 결혼의 조건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보다는 상대의 조건-능력있는 남성에게는 여성의 외모, 여성에게는 남성의 수입-이 더 고려사항이 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책에서 제시된 서구와 달리, 사회적 안전망, 사회 복지가 부재한 한국에서 개인의 일대기는 절대적으로 가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성공여부는 그 가족의 협조와 노력에 의해 좌우되고 그 결과는 가족의 보존과 재생산으로 귀결된다. 서구와 비교해 노동시장에서 요구되는 취업 자본(학력)은 비슷하지만 사회복지 대신에 가족복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시장에서의 교환을 위한 초기자본의 분배가 균등하지 않다. 또한 가족 단위와 배경에 의한 사회적 참여와 시장에의 진출은 개인의 자유로운 결합을 방해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물질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한국에서 성인남녀의 결합은 전통적 가족 이외의 형태는 인정되지 않는다. 미혼모, 이혼모, 이혼부의 가족에 대해서는 차별적 시선이 남아있고, 남남, 여여 가족에 대해선 상상조차 금기시된다. 이성애에 기반한 가족중심주의는 다원화되는 시대와 별개로 공고하게 가족을 결집시키고 보수화시킨다.

한국의 경우는 서구의 낭만적 사랑의 시기를 가지기도 전에, 사랑은 핵가족 단위의 재생산을 위한 결혼이라는 거래가 되어 버렸다. 자본 소유 정도와 그 형태가 결혼과 사랑의 거래조건이다.

한국은 여전히 이성애에 바탕한 가부장적 관념과 사회복지의 부재로 인해 가족모델이 생계단위로서 유효하고 유일한 생계단위이기도 하다. 사회가 없다. 그러한 전통적 가족모델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사회복지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개인의 해체적 수준을 감소시키며, 남녀성별 불평등을 존속, 강화시키는 한편, 미혼의 개인과 비-정상가족으로 분류되는 가족에 대해 사회적 압력과 심리적 부담을 강제한다.

  3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숨기고 싶은 것들, 타인에 의해 가볍게 취급되어지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서 밝혀지거나 지적당할 때의 불편함이란....내겐 이 책이 그러했다. 지난 십년을 몇 문장으로 간단히 환원되어 버린 듯해서...

사랑은 지독한 혼란이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책 제목이 묘한 입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