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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

낚지씨의 수상록-몽테뉴

by 바다기린 2010. 9. 2.


아파트 단지(단지라 할 것도 없는 규모지만)를 나서는 모퉁이에 술집이 하나 있다. 그 술집에선 커다란 수족관을 바깥에 내어 두는데 늘 낚지 한두 분이 들어 계신다. 가끔 지나다 뵈도 이 분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의 유리벽에 붙어서만 지내는 것 같다. 별달리 유심히 쳐다보는 것은 아니지만 유리에 딱 달라붙어 헤엄치기를 멈춘 낚지씨를 볼 때면 동병상련이 든다. 당장 언제든 손님이 원하면 제 몸이 토막 나 불에 달구어지는, 오늘 몸과 내일 몸이 다른, 죽을 시간을 받아 놓고 있는 낚지씨 입장에서 보면 어데다 감히 그 고통과 불안을 비견할 수 있냐고 거품을 물지도 모르겠지만. 삼십년을 붙어살아왔다는 회한과 앞으로도 붙어살 수밖에 없다는 예상에 젖어있는 나로서, 게다가 기간만 다를 뿐 죽을 날을 받아놓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이미 없을 낚지씨에게 푸념을 늘어본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폈다.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줄그은 걸 보니 책 속 1권만 읽고 나둔 모양이다. 몽테뉴는 붙어사는 인간들에 대해 이런 통찰을 던진다. 낚지씨도 들어 주길 바란다.

 만일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확실한 길을 포착한다고 하면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포착하리라. 그러나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한 자는 없다. ....우리가 일상 행하는 방식은 욕망의 흐름에 따라서 좌우로 또는 상하로 기회의 바람이 우리를 실어가는 대로 좇아가는 일이다. 우리는 원하는 그 순간밖에는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마치 가져다 놓은 자리의 색깔에 따라서 변하는 동물과 같이 변한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제안한 것을 금방 뒤바꾸며, 금방 걸어온 길을 되돌아간다. 그것은 요동(搖動)이며 줏대없음일 따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끈에 조종되는 인형처럼 움직인다. -호라티우스

우리는 떠내려가는 사물과도 같이 물이 소용돌이치거나 잔잔함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순하게, 또 어떤 때에는 거세게 실려 간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모른 채 부단히 찾으며, 마치 이렇게 해서 자기 짐을 벗어던질 수 있듯이 부단히 자기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매일 새로운 공상(空想)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분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인다.


 낚지씨도 수긍해 줄까. 댁도 댁을 어찌할 수 없듯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고. 댁의 삶이 잡힘과 달라붙음인 것처럼, 내 삶 또한 잡힘과 달라붙음을 면할 길 없다는 것을.
 
 수상록을 다시 펴보니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는 한편으로는 몽테뉴에게 그 뿌리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16세기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필치다. 알고 보니 에세이(수필)은 몽테뉴로부터 비롯된 장르이다. 원조는 다른 면이 있나보다. 못난 번역에도 빛이 들만큼 깊고 풍부함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나온지 오래된 혜원사판이다.
20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