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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란드 러셀

by 바다기린 2010. 9. 1.

                          
 

러셀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고 한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세 가지 정열이 나의 인생을 결정하였다. 즉 사랑에 대한 갈망, 인식에 대한 열망,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W, 바이셰델, 《철학의 뒤안길》,이기상 외 옮김, 서광사, 1990, 421쪽)  그에 비해 정열지수가 턱없이 낮은 나는 사랑, 인식, 고통에 대한 민감함 모두가 지지부진하다. 아마 내 삶이 지금과 같이 계속된다면 나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될 것이다. “ 내 인생을 결정한 건 게으름이었다.” 러셀의 책은 제목만 따져본다면 내 자서전의 출판제목으로 적합할 정도다. 하지만 내가 책을 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게으른 사람이 책을 쓰는 수고를 택할 리가 없을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는 까닭이다. ㅎㅎ

그렇다고 이 책은 나 같은 이의 게으름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러셀이 찬양하는 게으름은 생각하기에 따라,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과 대적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호의적이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 같다. ^^:

이 책은 1930년대, 아마 2차 세계대전을 앞에 두고 쓴 여러 에세이들을 묶어 놓은 것 같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그 중에 한 꼭지다. 러셀이 원하는 게으름이란 당시의 생산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된 하루 4시간 노동제의 실현으로 누릴 수 있는 인류의 여가이다. 쓸모와 이윤동기로 충동되는 경제적 삶이 아니라 무용과 기쁨동기로 이행되는 여유로운 삶의 향유이다.
당시의 생산력에 대해 자신보다 더 꼼꼼한 학자는 하루 1시간 노동제를 주장했다는 러셀의 말을 고려할 때, 지금의 생산력으로는 인류전체가 노동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과학기술을 주요한 생산력으로 하는 근대화된 국가들에 있어 필요한 노동력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술에 의한 노동의 대체는 거의 완벽한 수준에서 실현가능해 보인다.
러셀은 당시로서는 아주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자신의 주장이 어떠한 반발을 가져올지도 알고 있었다.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당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하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겐 언제나 충격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평일 근로 시간이 15시간이었다. 아이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고 어른만큼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 시간이 약간 긴 것 같다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제넘게 제의했을 때 되돌아온 대답은, 일이 어른들에겐 술을 덜 먹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따낸 직후였는데 몇몇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에서 대단히 분개했다. 나는 한 늙은 공작부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구.”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보단 덜 노골적이지만 그 정서는 그대로 남아 경제적 혼란의 뿌리가 되고 있다. (러셀, 22~4쪽)>

얼마 전 금융노조에서 은행업무시간을 1시간 단축하는 것을 노사협상의 의제로 삼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고객들의 이용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도 있었고, 노조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보는 보수언론의 공격과 귀족노조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도 작용했을 테지만, 어쨌든 한국에서는 한 시간 노동시간단축 조차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를 초래한다. 은행의 사정을 읽어보면 16시 30분 정각 셔터 문을 내린 후 계속되는 노동이 규정된 퇴근시간과 노동시간을 무효화시키기에 그러한 고달픔이 단체협상의 의제로까지 만들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구조조정이후 은행권에서는 다년간 정규직에 대한 노동강도강화와 초과노동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 의제는 보도된 바와 달리 노동시간단축이 아니라 노동시간준수에 대한 요구였던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어떤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러셀의 주장을 정치적 공약으로 내세운다면 그가 당하게 될 마녀사냥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19세기 귀족의 고약한 사고는 21세기 자본가에게서 별 나아진바가 없어 보인다.
언제쯤 되어야 러셀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날이 올려는지. 노동시간단축을 현실적인 실업 대책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 질 것인지. 주5일노동제의 도입에도 한국은 여전히 장시간노동국가에 속한다. 노동시간단축은 귀족노조의 배부른 소리로 취급되기 일수다. 노동시간단축을 통해 정규직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기 보다는 정규직일자리를 비정규직 또는 용역․파견으로 대체하고 더 적은 임금으로 장시간노동을 지속확대 시키려 혈안이다. 일방적 정리해고는 일상사이다. 러셀의 제안이 80년 정도 지난 것이지만 우리에겐 80년을 훨씬 더 앞선 요원한 얘기인 것만 같다.  

한편, 이 책은 교육에 관한 책으로 분류해도 좋을 정도다. 해법으로서의 교육의 역할과 내용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스며있다. 대안적 실천으로서의 교육이 그의 고민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꼭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새겨들어도 좋은 글이다.
 러셀은 차분히 역사와 현실을 오르내리며 나아갈 바와 그렇지 못한 바에 대해 숙고한다. 그의 정열, 인품과 명민함이 글의 간결함과 재치 속에 두루 묻어난다.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 한국에서 출판된 이래 13쇄를 거듭한 것 같다. 인문학책으로는 드문 일이다. 러셀의 글이 간결하며 논리적인 탓도 있겠지만 번역의 깔끔함도 칭찬해줘야 할 것 같다.

러셀은 “이 세계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통찰이다.”(바이셰델, 432쪽)라고 얘기한다. 이 세계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러셀의 통찰을 귀담아 들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