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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

모차르트-엘리아스

by 바다기린 2010. 9. 1.

베토벤 자신은 모차르트처럼 상스러운 음악은 만들지 않는다 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했다해서 그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무시하거나 싫어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베토벤은 바흐나 하이든의 작품들을 비롯해 모차르트의 악보를 수집했으며 빌려서라도 계속 공부하고 있었을 정도로 모차르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베토벤이 그렇게 자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둘이 속했던 당대 사회의 급격한 구조변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불과 한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처했던 정치사회배경은 급격히 달라진다. 모차르트가 고용된 제후에게 아침문안을 올리거나 귀족들의 미술시간을 위해 피아노를 반주해 줘야 했던 시대에 속했던 반면, 베토벤은 그가 지나가면 왕족들마저 길을 비켜주는 시대를 만나게 된다. 베토벤의 귀족과의 대등한 관계설정은 그의 음악적 재능과 성공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봉건귀족들의 위기와 부르주아계급의 성장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봉건사회의 신분차별에 그대로 묶여 있어야 했던 불운을 겪어야 했다. 예술사적으로 보자면, 모차르트가 주문자의 취향을 위해 예술을 보급하는 '수공업 예술’이라는 중세사회구조에 종속되어있었다면, 베토벤은 음악가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르는 예술을 창작하는 ‘예술가 예술’이라는 근현대 사회구조에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토벤 역시 돈을 위해 테이블 뮤직을 만들기도 했다 술회하지만, 베토벤은 모차르트에 비해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한 전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모차르트의 짧은 생의 비극과 어떤 면에서는 상스럽게도 들릴 수 있는 그의 일부 작품은 그러한 봉건구조에서 뛰쳐나오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태도는 자신의 환상의 흐름에 충실하려 하고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의 자기 통제에 따르려 했던 ‘자유 예술가’ 적 태도였던 반면, 생계 수단은 전적으로 궁정 귀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비극적 삶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197)

이러한 연유로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달리 자신의 음악은 상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심이 장난을 치거나 연정의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차르트 선율들을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엘리아스의 글에서 인용된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그러한 평가에 이런 변호를 해준다.

“처음 두 곡(피아노 협주곡 제22번 KV482, 피아노 협주곡 제23번 KV 488)은 그가 마치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고, 빈 사람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청중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멀어짐을 느꼈고 그래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들을 계속 작곡함으로써 그 사랑을 다시 얻으려 했던 것이다.”(58)

이 책을 읽게 된 건, 모차르트에 대한 관심보다는 엘리아스에 대한 관심, 보다 정확히는 엘리아스의 모차르트에 관심, 엘리아스가 모차르트를 만났을 때 과연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게 될까라는 세인의 호기심이 작용해서였다. 책을 다 읽고선, 조금 짧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듯 했다. 책의 말미를 읽어보니, 이 책은 엘리아스의 미완의 작업을 편집자가 저자와 같이 교정보완해서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엘리아스는 이 책에서 모차르트가 속했던 사회적 배경을 그리면서,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자신의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와 의미부여의 맥락을 풀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노력과 사회적 한계조건 속에서 모차르트가 어떻게 한 성인으로서 성장하게 되는지, 예술가로서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결단적 기투를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모차르트의 중년기 이후의 삶을 다루지 않아 내용적으로 부족한 감이 있지만, 엘리아스의 글은 모차르트를 타고난 천재라기보다는 그 시대지형에 속했던 한 음악가의 사회적 실존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베토벤과 꼭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나는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를 조금 더 알게 된 지금도 그이의 음악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취향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내가 접해온 모차르트 소비에 대한 거북스러움이 더 큰 싫음의 연원이 있는 것 같다. 노다 메구미가 ‘모차르트는 핑크’라고 말했듯, 가볍고 살랑거리는 다수 모차르트 곡들이 내 귀에는 조금 알맞지 않다. 그리고 일부 서점이나 예식장, 백화점, 보석상 등에서 울려 퍼지는 모차르트. 모차르트 음악의 태생적 한계 때문인지 과시와 치장을 위해, 돈을 유혹하기 위해 소비되는 모차르트는 그 어떤 음악보다 천덕스럽게 들린다. 음악시간 엄숙하게 틀어주던 발랄한 모차르트. 그의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똑똑해진다며 팔려나가는 모차르트. 아무래도 내 거북스런 느낌은 모차르트와는 무관하게 한국적 조건에서 모차르트가 소비되는 여러 껄끄러운 상황에 대한 반감이 더 큰 것 같다.

아이만 같았던 모차르트. 그는 자신을 동등한 인격으로, 예술가로서 대해주지 않는 봉건질서에 분노하고 허영과 위선에 가득 찬 속물 귀족계급을 조롱했었다. 생존을 위한 타협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까지 돈다발에 팔아넘기지는 않았다. 한국에선 모차르트가 말년에 프리메이슨에서 지도자 층에 속할 정도로 정치적이었으며, 전 생애 동안 당대 지배계급에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은 신동과 천재라는 찬양과 선동 뒤에 모른 척 간과되는 것 같다. 일부 모차르트 음악은 베토벤의 평가처럼 그렇게 들릴지 모르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의 세속적 평가와 달리 모차르트라는 사람 역시 그의 음악처럼 다정했고 순수했다. 그는 다수 세인들처럼 천재라는 맹목에 매달리지 않았다. 때론 장난스레 표현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책과 더불어 MBC에서 방송된 모차르트 다큐를 보기를 권한다. PD가 모차르트에 관한 책을 낼 정도로 열렬한 팬 덕분인지  책의 공백을 메워주며, 역사의 모차르트뿐 아니라 오늘날 모차르트가 어떻게 유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실감을 더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악가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짧은 출연이 긴 여운을 남긴다.  다큐멘터리 정도는 무료로 해줘도 좋으련만 유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