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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드라마/영화

피와 뼈

by 바다기린 2010. 9. 3.

주인공 김준평은 재일교포인 원작자의 아버지가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어떤 누리꾼은 김준평을 두고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야쿠자가 모델이라고 반박한다. 자식을 계단에서 민다던가, 자식과 칼싸움을 벌인다던가 그리고 자식에게 상속을 거부하는 것 등은 일반적인 한국인 아버지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로선 그런 모습이 일본야쿠자들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내겐 그의 모습에서 한국 아버지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내에 대한 폭력, 신체와 핏줄에 대한 집착, 재산에 대한 소유욕, 방만한 성적 욕구, 강함에 대한 숭배 등등. 김준평이 인간 윤리를 초월한 야수처럼 보이거나, 무자비한 개념 없는 일본 야쿠자로 보이는 것은 이 모든 사례를 총합해서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극단에서 조금 도수를 낮추거나 어떤 것은 제하면 그에게서 한국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술 먹고 깽판을 피우거나, 두 집 살림을 하거나, 가족에게 굴림하거나 보신과 정욕에 대해 물불가리지 않는 모습들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여전히 건재하는 아버지라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어떠한 문화적 혜택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 세대, 자신의 힘으로써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세대 그러한 개인들에게 있어 자기 자신을 무기화시키는 것은 본능적인 생존의 방편이었다. 그들은 대화라는 문화적 소통을 배우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인정(認定)이나 사랑을 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폭력만이 수단이 된다. 김준평도 우리 세대 혹은 전세대의 평범한 아버지들처럼 그러한 세대와 개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김준평은 걔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보일정도로 극단적이었다는 것.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남는 다는 것, 그 생존투쟁의 극단적 경계에 김준평이 있기에 그가 일본인처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아들 마사오 때문에 웃으며 봤다고 하는데 나는 어느 한 장면에서도 웃질 못했다. 착잡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어렴풋 그에게서 젊었을 적 우리 아빠의 한 때 모습을 봐서일까. 그런 일이 한 때로 끝난다면 시간이 지난 후 웃을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되풀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도 아버지란 작자가 그 모양이라면, 그의 가족으로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끔찍한 공포일 것이다.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이성을 결여한 야수성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생지옥이다.

  김준평으로 분한 키타노 타케시는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을 만큼 실제인물 같은 연기를 선보인다. 오다기리 죠의 거친 모습도  볼 수 있다.    

뭔가를 먹으면서 보기에는 어려운 영화이다